'저널리즘'은 한국기자협회에서 발행하던 잡지라 큰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저널리즘'의 편집인이었던 김주언씨는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인 1998년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추진위원장을 맡아 '오보(誤報) 전시회'를 열면서 "조선일보가 반공구호를 만들기 위해 소설을 썼다"며 허위주장을 폈다. 2006년 징역형 확정으로 신문발전위 사무총장에서 면직된 김씨는 현재 언론관련 시민단체인 언론광장 감사, 시민사회신문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같은 달 MBC PD수첩도 오보 논란을 보도했으며, 이용석 PD는 승복군의 형 이학관씨에게 고소를 당했다가 "고의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됐다.
김종배씨는 그해 10~11월 '미디어오늘'과 월간 '말'지 등에 '조선 이승복 기사 이래서 오보다' 등의 글을 계속 실었다. 김씨는 2006년 11월~2007년 10월까지 MBC 라디오 '김종배의 뉴스터치'를 진행했다.
입력 : 2009.02.13 02:5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12/2009021201708.html
- 이승복 사건의 진실을밝혀준 한 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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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이웃 노인, 충격에 정신질환으로 숨져…아버지도 정신병 ##.
♧ 30년전인 1968년 12월9일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일당이 일가족을 엽기적으로 살해한 사건에서 서른 여섯 군데나 칼에 찔
린채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이학관씨(45·당시 15세·한국전력 근무).그
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된 동생 승복이
의 이야기가 새삼 언론에 거론되며 '조작설'까지 나오는데 대해 난감한
모습이었다. 이씨를 통해 당시 현장의 모습과 그후 이씨 가족의 비극에
찬삶을 들어보았다.
이씨는 사건 당시 아랫방에 앉아 옥수수 알을 까고 있었고 동생 승복
(9)이는 숙제를 하고 있었으며 두 동생(승수·승자)은 잠을 자고 있었다
며 담담하게 증언했다.
◆ 1968년 12월9일 밤
승복이의 열번째 맞는 생일날, 저녁상을 물리고 얼마 안되어 어머니
(주대하·당시 34세)가 혼자 메주를 쑤던 윗방으로 두 명의 공비가, 아
랫방으로 세 명의 공비가 불쑥 들어 왔다. 그리고 얼마 뒤 승복이에게
한 공비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공비가 '야, 너는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하고 물
어요.승복이는 학교서 배운대로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서슴없이 '우리는
북한은 싫어요.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바로 그 공비가 '야-!'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승복이의 멱살을 잡
아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순간 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엉거주춤했는데
제 옆에 앉아있던 공비가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찍어 내렸습니다. 털썩
주저앉으며 보았더니 멱살에 잡혀 버둥거리는 승복이에게 문 가까이 서
있던 놈이 칼을 들고 승복이에게 다가가더니 입 속으로 칼을 쑤셔 박았
어요.".
발버둥치는 승복이의 볼에서 선혈이 난자하게 터지며 외마디 비명소
리가 났다. 동시에 윗방의 어머니가 "악! 사람살려!"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옷고름이 터지고 젖가슴에도 공비들의 날이 시퍼렇게 선 대검이
깊숙하게 찔러 들었다. 그녀의 발자국이 찍힌 매주콩 위로 붉은 피가 흥
건하게 고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난동에 대항하려던 이학관은 공비들로부터 머리
와 등, 그리고 손등 위로 서른 여섯번의 칼질을 받아야 했다. 두 칸의
보금자리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러자 잠자던 어린 두 동생들도 깨어나 울부짖기 시작했어요. 나는
엎드린 채 등에 여러 차례 칼이 박혔지요. 그 틈에도 저는 공비 중 한
놈이 동생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놈은 '이건 또 뭐이야'하더니 막내의 두 다리를 한 손으로 번쩍 잡
아 거꾸로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벽에다 머리를… 패대기를 쳤어
요.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나왔던 세째 동생도 같은 방법으로 패대기쳤
어요. 그리고는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동생들의 머리가 부딪힌 벽엔 주사기로 뿌린 것처럼 여기 저기에 피로
칠갑이 되었고 학관이가 까 놓았던 노란 옥수수 알갱이들은 붉은 피로
버무려졌다. 네 명의 아이들이 흘린 피는 볏집 돗자리 속으로도 베어들
었다.
엽기적인 살인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 후 이학관은 자신
의 몸이 들려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공비 한 명이 밖에 서서 이학관
의 몸을 받아들고 방안의 두 명이 자신을 들어 밖으로 밀어 내더란 것이
다. 이학관은 깜깜한 겨울밤에 퇴비장속으로 내던져 졌다. 그리고 의식
은 오락가락.
그 사이 일곱명으로 추정되는 공비들은 어린 동생들을 하나씩 방에서
밖으로 옮긴 뒤 아직 숨이 붙어 있다고 판단되었는지 계단석에 아이들의
머리를 다시 한번씩 패대기 쳤다.
다음날 맨 처음 현장 사진을 찍은 김진우(63)씨는 "승복이는 입에서
귀까지 찢겨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네살배기 여동생은 두개골이 부서진
채 뇌가 퇴어나와 있었고 계단석에도 허연 뇌수가 피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고 말했다. 공비들은 입을 찢은 승복군도 방 밖으로 끌어 내 뒤
통수를 가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2년 10월25일, 현재의 이승복기념관
으로 유해를 이장할 때 김창규(62)씨는 승복군의 두개골이 세 조각으로
박살나 있음을 확인했다.
어머니 주대하씨는 윗방에서 칼부림을 당한 채 밖으로 나올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다. 시체를 목격한 사람들은 가장 처참
한 죽음을 당한 이가 어머니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녀는 밖으로 옮겨
지던 순간까지 피묻은 두 손으로 흙벽을 긁으며 끌려나가지 않도록 애쓴
흔적을 방안에 남겨 두었다. 밖으로 끌려 나온 뒤에도 대검이 그녀를 난
자해 숨을 끊어 버렸다. 그녀의 시체는 끝까지 저항하려는 듯 두 손이
들려진 채 사후경직되어 있었다.
이날 아버지 이석우씨는 할머니 강씨와 아랫마을로 내려가 주민의 이
사를 도운 뒤 혼자 집으로 돌아오다 마당에서 공비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씨는 공비들과 격투끝에 오른쪽 대퇴부에 상처를 입고 도피에 성공했
다. 이씨를 놓친 공비들은 서둘러 옷가지와 닭, 옥수수 등을 챙긴 뒤 집
을 빠져 나갔다. 그 후 정신을 차린 이학관은 1km남짓 산을 내려가 숙모
뻘되는 최순옥(66)씨 집에서 간호를 받다 다음날 새벽, 신고를 받고 달
려온 예비군들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헬기에 실렸다. 피를 많이 흘렸던
이학관은 헬기안에서 의식을 잃은 뒤 사흘 뒤 깨어났다.
40여일간의 치료를 통해 생명을 건진 이학관에게 육군병원측은 요양
을 위해서라도 장기 입원해야 한다며 만류했지만 이학관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때까지 이학관은 가족들의 죽음을 누구로부터도
확인받지 못했고, 마음속으로 자기처럼 어떻게든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애
써믿고 있었다고 한다. 함께 입원해 있던 아버지는 일체 가족들의 이야
기를 큰 아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정든 초가삼간은 성한 문짝 하나
없었고 서까래도 내려 앉은 채 폐가로 변해 있었다. 학관은 아무 말 없
이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운두령 앞 산을 올랐다. 부자가 도착한 곳은
봉분 네 개가 나란히 만들어 진 사랑하는 가족들의 무덤이었다. 이학관
은 여기서 졸도를 했다고 한다.
◆ 1968년 12월10일 아침
잔혹한 사건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날 오전, 현장에서 시체 수습을 도
왔던 승복군의 바로 아랫집에 살던 최재복씨의 부친은 그 후 1년동안 멍
하니 있으며 헛소리를 하다가 사망했다. 승복군의 할머니 강씨도 정신질
환을 앓으며 보이는 사람마다 욕설과 돌팔매질을 하다 지난 81년 사망했
다. 사건 직후 각지로부터 성금이 답지했으나 화전민 출신인 승복군의
아버지 이석우씨는 술과 여자로 돈을 탕진하며 장남 학관군을 돌볼 줄
몰랐다. 이씨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초기 증세는 심각하지 않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이씨가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이후부터였다. 그는
현재 춘천 국립정신요양원에서 입원중이다.
한편, 병원에서 퇴원한 이학관은 중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데다 가난한 외가에 얹혀 살면서 도시락도 재대
로 가져가지 못한 채 굶주림과 싸우다 1972년에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했으나 세 번이나 낙방해야 했다. 보호자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와 할머니 강씨를
보호하며 살아야 했으니 당연할 지도 모른다. 1974년, 그는 강릉 상업고
등학교장의 배려로 특례 입학할 수 있었고, 등록금과 학비는 학교장이
면제해 주었다.
1977년, 학교를 마친 뒤 강원은행 강릉지점에서 창구 직원이 되었다.
남들보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성실함 하나로 버텨 가던 이학관씨는 하루
도 거르지않고 창구로 찾아와 강릉 시청에 납부된 세금을 예치하던 시청
여직원 김인자씨와 자연스레 친해졌다.
김씨는 가난, 비극의 상처, 그리고 정신이상인 두 어른(할머니 강씨,
아버지 이씨)만이 전부이던 이학관씨를 떠나지 않았다. 김씨는 "너무나
착한 남자였어요. 그런데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라며 당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심정을 기자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이학관씨에게 시련은 멈출 줄 몰랐다. 1979년, 강릉은행 분점
이 한 밤중에 털리자 말단 직원이던 이씨가 책임을 지게 돼 물러나야 했
다. 스물 여섯에, 직장을 잃고 막막할 무렵 난데없이 영장이 나왔다. 신
검결과 1급 갑. 그는 동생들이 모두 사망해 3대 독자라는 이유로 방위에
소집되어 6개월 만기 근무를 했다(참고로, 저널리즘에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는 글을 실었던 김종배씨는 "나는 시력이
나빠 군 면제를 받았다"고 말했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예비군 중대에서 근무할 때엔 친구 집에서 출퇴
근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도 굶고 도시락도 없이 출근 해 저녁 한
끼만 겨우 먹어야 했던 시절, 김인자씨는 주말이면 음식을 싸 들고 대관
령고개를 넘어 이학관씨를 만나러 오곤 했다.
1980년 가을, 김인자씨는 주위의 만류도 뿌리친 채 집도 절도 없던 이
학관씨의 청혼을 받아 들여 결혼을 했다. 참극을 당한 뒤 12년만에 처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그를 지금까지 내버려 두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작설'의 진위를 두고 잊을 만 하면 그
의 아픈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지난 9월2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공산당이 싫어요- 나도 들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그는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고 한다. "그동안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증인들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시달려 온
감정들이 이제야 풀어지는 것 같다"고 기자에게 전화를 해 왔다. 그의
밝은 음성이 더 이상 어두워 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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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승복군의 담임 김종욱(76) 선생님
"공산당 잔학상 가르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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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르친 어린 제자가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믿고 말하다 참변
을 당했다는 사실은 김종욱 교사의 가슴을 오랜 세월 짖눌러 왔다. 이제
는 교육계에서 정년퇴임한 그는 당시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에 근무하며
이승복군에게 어떻게 반공 교육을 시켰는지 상세히 털어 놓았다.
"당시엔 각처에서 공비들이 출몰해 양민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였지요.
교육 일선에서는 반공 교육이 무엇보다 강조되던 시절이었고 양민들이
살해된 보도를 접할 때마다 교육 담당자나 온 국민이 분개하고 있을 때
였지요.".
-승복이를 지금도 기억하십니까.
"가정은 퍽 가난하고 불우했지만 순진하고 착실했습니다. 마치 계곡
에서 내려오는 물처럼 맑고 깨끗한 아이였어요.".
-승복이에게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 얼마전에 정선에서 일가족이 참변을 당했는데 강원일보에 크게 났
었지요. 나는 이 신문을 아이들에게 펼쳐 놓고 '이런 짐승만도 못한 공
비들이 각처에 다니면서 양민 학살을 하고 있다'며 공산당의 잔학성을
가르쳤습니다. 아주 비감어린 교육이었어요. 승복이는 감수성이 예민하
던 2학년이었으니 뼈속 깊이 사무치게 들었을 겁니다. 그런 교육을 받지
만 않았어도 어쩌면 살아 있었겠지요. 평생 이런 생각을 화두로 삼고 살
아왔습니다.".
-그 화두는 깨치셨습니까.
"요즘은 햇빛정책이니 하지만…. 그러나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
른 것은 그른 것이라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까. 난 평생을 고민해 봤지만
역시 반공 교육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승복이가 하늘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어떤 말씀
을 해 주고 싶으십니까.
"지금도 그때와 같습니다. 잘못은 응징하고 바른 사람이 되거라 하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 이동욱 월간조선부기자·done@chosun.com*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93070236
시론] 누가 역사를 조작했는가
- 이경재 · 변호사
입력 : 2006.12.13 19:40 -
- 이경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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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의 무덤 앞에서 70대 전후의 노병(老兵)들이 모여 이승복 추모제를 올렸다. 이승복군이 사망한 지 꼭 38년 되는 날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68년으로 되돌아 가자. 그해 1월 북한 공산집단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목적으로 김신조 등 대규모 무장특수부대 요원을 보내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다. 그후에도 북한 공산집단은 무장공비를 줄기차게 침투시켰다.
급기야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이승복 어린이(당시 9살) 일가족 4명이 북한 무장공비에 의해 무참히 난자당해 살해되는 전대미문의 무장 테러가 발생했다. 온 국민이 분노했고,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 어린이의 절규는 온 국민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후 이승복은 북한 공산집단의 잔혹상을 고발하는 상징으로, 그 굳건한 기상으로 교육현장에 자리잡아 왔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며 역사적 진실이다.
그후 30년. 김대중 정부 첫 해인 1998년 일부 세력들은 “이승복사건은 오도된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작된 신화이며, 조선일보가 앞장서 이 신화를 조작했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조선일보의 1968년 12월 11일자 사회면 “공산당이 싫어요…어린 항거 입 찢어”라는 기사는 1998년 8~9월 서울시청 지하 보도와 부산역 광장에서 대형 패널에 내걸려 지나가는 뭇 행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라는 단체는 속칭 ‘오보(誤報)전시회’를 하면서 ‘이승복 전시물’에 이런 설명을 붙였다. “반공 구호 앞엔 진실도 필요 없나?”란 제목 아래에 “나는 거짓말이 싫어요, (중략) 기사를 쓴 기자는 현장에 가지도 않고 현장 생존자도 만나지 않았다. 기사가 아니라 소설이었다”고 적었다.
조작설 유포 세력들은 원고지 1400자 분량의 이승복 기사 전체가 소설·작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시발로 김대중 정부의 비판 언론 탄압은 극에 달했다.
지난달 말 진실 공방은 법적 분쟁 8년 만에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법적으로 완결되었다. 비록 조작설을 처음 제기한 김종배는 ‘자신의 기사가 허위라는 인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지만 그의 주장이 허위·억지임이 대법원에서 재확인된 것이다. 오보전시회를 주관한 김주언은 허위 인식을 갖고도 오보전시회를 강행했다는 이유로 유죄가 확정됐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게 끝인가? 이승복군의 유족들 가슴엔 피멍이 들었다. 수많은 초·중등학교에서 이승복 동상이 사라졌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승복 부분이 지워졌다. 온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작설을 제기한 인사들은 어떤가. 자신들의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고 있고, 유족들이나 신문사에 사과 한마디 없다고 한다. 이승복 조작설 유포로 유명 인사가 된 김종배는 지금도 MBC라디오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뉴스프로를 진행하고 있다. 김주언은 언개련 사무총장과 한국언론재단연구 이사를 거쳐 노무현 정부가 강행 통과시킨 새 언론법에 의해 설치된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 주변 단체에서 승승장구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년은 거짓 폭로와 이를 통한 대중 선동이 판을 친 시대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때나마 성공하는 듯했다. 이렇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사회는 정의롭지도 않고 발전할 수도 없다. 역사를 조작하려 한 자와 조작설을 퍼뜨린 자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유를 들어 자신을 옹호하려 하나 국민과 역사는 그들을 단죄하고 기록해서 다시는 이런 간교한 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그 조작작업에 정치적 배경까지 숨어 있는 것이라면 그 진실도 밝혀져야 한다. 과거사 바로 잡기는 바로 이런 것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2/13/20061213015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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